필리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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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2세는 116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왕으로, "신의 선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179년 공동 통치 왕으로 즉위한 후 1180년 단독 왕이 되었으며, 플랜태저넷 왕가와의 항쟁에서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 간의 불화를 이용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존 왕의 실정을 틈타 프랑스 영토를 확장했고, 1214년 부빈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랑스의 우위를 확립했다. 내정에서는 파리 정비, 파리 대학교 설립 등을 통해 프랑스 국민 의식을 높였으며, 프랑스 왕국 최초의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아 존엄왕(Auguste)으로 불린다. 그는 이자벨 드 에노, 잉게보르, 아녜스 드 멜라니와 결혼했으며, 루이 8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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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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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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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프랑크인의 왕/프랑스 국왕 |
스타일 | (더 보기...) |
출생일 | 1165년 8월 21일 |
출생지 | 고네스, 프랑스 |
사망일 | 1223년 7월 14일 |
사망지 | 망트라졸리, 프랑스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별칭 | (필리프 오귀스트), (신의 선물) (디외도네) |
통치 | |
즉위 | 1180년 9월 18일 |
대관식 | 1179년 11월 1일 (공동 왕으로서) |
대관식 유형 | 대관식 |
이전 통치자 | 루이 7세 |
다음 통치자 | 루이 8세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이사벨 드 에노 (결혼: 1180년 4월 28일, 사망: 1190년 3월 15일) 잉에보르 애 단마르크 왕녀 (결혼: 1193년 8월 15일 & 1201년) 아네제 디 메라니아 공녀 (결혼: 1196년 6월, 취소: 1201년) |
자녀 | 루이 8세 마리, 브라반트 여공작 필리프 1세, 불로뉴 백작 피에르 샤를로, 노용 주교 (사생아) |
자녀 정보 | 더 보기... |
가문 | |
왕가 | 카페가 |
아버지 | 루이 7세 |
어머니 | 아델 드 샹파뉴 |
2. 생애
필리프 2세는 1165년 8월 21일 고네스에서 루이 7세와 그의 세 번째 아내 아델 드 샹파뉴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온 아버지 덕분에 'Dieudonné|디외도네프랑스어'(신의 선물)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 루이 7세가 중병에 걸리자, 1179년 11월 1일 14세의 나이로 랭스 대성당에서 공동 통치 왕으로 즉위했으며, 1180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15세에 단독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외척인 샹파뉴 가문의 영향력이 강했으나, 곧 친정을 시작했다.
그의 치세는 프랑스 내 플랜태저넷 왕가의 광대한 영토 문제 해결에 집중되었다. 그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 사이의 불화를 이용하여 프랑스 왕권 강화를 꾀했으며, 헨리 2세 사후 즉위한 리처드 1세와는 처음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제3차 십자군 원정에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였던 필리프는 십자군 원정에서 일찍 귀환한 뒤, 리처드 1세의 부재를 틈타 그의 동생 존의 왕위 찬탈을 부추기고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공격했다. 리처드 1세와의 전쟁에서는 고전했으나, 1199년 리처드 1세가 전사하고 존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필리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필리프 2세는 존 왕의 실정을 이용하여 노르망디, 앙주, 메인 등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며 왕령을 크게 확장했다. 존 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플랑드르 백작 등과 연합하여 반격에 나섰으나, 필리프 2세는 1214년 부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 세력을 거의 소멸시키고 프랑스 왕권의 우위를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세 번의 결혼 과정에서 교황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180년 에노의 이자벨과 결혼하여 후계자 루이를 얻었으나, 이자벨 사후 1193년 잉게보르와 결혼했다가 곧바로 그녀를 멀리하고 결혼 무효를 시도했다.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196년 아녜스 드 멜라니와 세 번째 결혼을 강행하여 중혼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과 성무정지 제재를 받았다. 결국 정치적 필요와 아녜스의 사망 등으로 1213년 잉게보르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필리프 2세는 1223년 7월 14일 망트라졸리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고 왕령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이후 강력한 프랑스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 유년 시절과 즉위
(c. 1450–1475, Maître de Rambures 제작)]]단독 왕으로 즉위한 해인 1180년 4월 28일, 필리프는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 백작 부인 마르그리트 1세의 딸인 에노의 이자벨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바욤에서 열렸으며, 이자벨은 지참금으로 아르투아 백작령을 가져왔다. 이자벨은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혈통을 잇고 있었기에, 이 결혼은 카페 왕조와 카롤링거 가문의 결합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으며, 왕위 계승자인 루이를 낳았다.
즉위 직후, 아버지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실질적인 권력은 필리프에게 넘어갔다. 초기에는 외삼촌인 앙리 1세 드 샹파뉴 백작이나 장인 보두앵 5세, 어머니의 친정인 블루아 가문 등의 세력이 강했으나, 필리프는 곧 이들을 누르고 친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대귀족들은 필리프의 결혼에 불만을 가졌고, 그의 어머니와 네 명의 삼촌들 역시 필리프가 아버지로부터 국왕의 인장을 넘겨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2. 2. 플랜태저넷 왕가와의 항쟁
플랜태저넷 왕가는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앙주 백작으로서 필리프 2세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봉신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가인 카페 왕조는 본래 파리 백작이었으며, 실권은 일 드 프랑스와 일부 왕령에 한정되어 강력한 제후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선왕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하고 그녀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잉글랜드에서 남프랑스에 이르는 광대한 앙주 제국의 탄생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국은 플랜태저넷 왕조에 병합될 위기에 처했으나, 필리프 2세의 탄생으로 위기를 넘겼다.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 앙주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필리프 2세는 선왕 루이 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젊은 헨리 왕, 조프루아 2세, 리처드 1세, 존) 사이의 불화를 이용했다. 그는 헨리 2세의 아들들과 친분을 쌓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부추겼다. 특히 넷째 아들인 조프루아 2세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 사이에는 여러 갈등이 있었다. 1183년 헨리 2세의 장남 젊은 헨리 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이자 필리프 2세의 누이였던 마가렛의 지참금 반환 문제가 불거졌다. 필리프 2세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약혼 계약에 따라 지참금이 프랑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국왕은 기소르 근처에서 회담을 가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헝가리의 벨라 3세가 마가렛과의 결혼을 원하면서 헨리 2세는 결국 지참금 반환에 동의했다.
또한 헨리 2세의 넷째 아들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가 1186년 마상 시합 도중 사망하자, 그의 유복자 아르튀르 1세의 후견인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헨리 2세는 자신이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봉건 영주인 필리프 2세는 자신이 정당한 후견인이라고 맞섰다. 필리프 2세는 다른 누이 알리스와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의 약혼이 지연되는 문제도 제기했다.
이러한 갈등은 1186년부터 1188년까지 2년간의 전투로 이어졌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필리프 2세는 1187년 여름 베리를 공격하여 이수둔 요새를 점령했고, 헨리 2세와의 휴전으로 이수둔을 확보하는 대신 프레테발을 방도무아에 양도했다. 1188년 여름, 필리프 2세는 다시 적대 행위를 시작하여 샤토루를 점령했다. 그는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사이의 소원함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리처드 1세는 1188년 11월 봉물랭에서 자발적으로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189년, 헨리 2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리처드 1세는 공개적으로 필리프 2세와 협력하여 아버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헨리 2세를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추격하고 투르를 점령했으며, 결국 헨리 2세는 리처드 1세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아제르리도 조약(1189년 7월 4일)을 통해 필리프 2세에게 다시 경의를 갱신하고, 이수둔( 그라세와 함께) 양도를 확인했으며, 오베르뉴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헨리 2세는 이틀 뒤 사망했다.
헨리 2세의 뒤를 이은 리처드 1세는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제3차 십자군에 참가했고, 서로의 영토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였던 필리프 2세는 십자군에 큰 열정이 없었고, 리처드 1세와도 대립했다. 아크레 포위전에서 아크레를 함락시키자마자 병을 이유로 프랑스로 귀국했다[1]. 이때 도중에 교황을 방문하여 십자군에서 탈퇴하고 귀국한 이유를 해명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의 왕위 찬탈을 선동하고 노르망디 각지를 점령해 나갔다.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 오스트리아에서 레오폴트 5세 공작에게 붙잡히자, 필리프 2세는 그의 신병을 확보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석방을 늦추도록 청탁하며 존의 찬탈을 지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리처드 1세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자,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조심해라, 악마가 풀려났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 1세는 존을 굴복시킨 뒤, 포로로 잡힌 동안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내 영토(벡상 등)를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필리프 2세는 아키텐 공령의 제후들을 선동하여 리처드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대항했지만, 전쟁에 능한 리처드 1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영토를 회복당했다. 특히 1194년 7월 3일, 벙돔 지방 프레토발 전투에서는 필리프 2세가 금고나 공문서까지 버리고 도주해야 할 정도로 크게 패배했다. 1196년의 기종 조약에서는 지소르를 제외한 점령지의 전부를 리처드 1세에게 반환했다. 그러나 1199년 리처드 1세가 아키텐 공령 샬뤼에서 전사하고, 조카 아르튀르 1세와의 경쟁 속에서 존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2. 3. 제3차 십자군 참가와 귀환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프랑스 대연대기''에서 발췌한 14세기 후반 채색 필사본)]]필리프 2세는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성지로 떠났다. 그는 1190년 7월 4일 베즐레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십자군이 함께 이동했지만, 리옹에서 군대가 나뉘었다. 리처드 1세는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기로 결정한 반면, 필리프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제노바로 육로를 택했다.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메시나에서 다시 만나 함께 겨울을 보냈다.
1191년 3월 30일, 프랑스군은 성지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고, 4월 20일 필리프 2세는 이미 소규모 십자군이 아크레를 포위하고 있던 아크레 포위전 (1189-1191)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리처드 1세가 6월 8일 도착하기 전에 공성 장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3차 십자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 등 여러 군주가 참여했지만, 서로 반목하여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다[1]. 7월 12일 아크레가 항복할 무렵, 필리프 2세는 이질에 심하게 걸려 십자군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 현실주의자였던 필리프 2세는 십자군에 큰 열정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크레 함락 후 리처드 1세가 보인 오만한 태도는 필리프 2세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더 중요한 사건은 아크레 포위전 중 베르망두아 백작령을 소유하고 있던 플랑드르의 필리프 1세가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필리프 2세가 강력한 블루아-샹파뉴 파벌을 고립시키기 위해 맺었던 기조르 조약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결정에 대해, 그가 맡은 임무를 마치지 않고 떠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면 그의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191년 7월 31일, 필리프 2세는 1만 명의 프랑스군(병사 급료로 5천 실버 마르크 포함)을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의 지휘 아래 아우트르메르에 남겨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필리프 2세와 그의 사촌 느베르 백작 피에르 드 쿠르트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리처드 1세의 행동에 대해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이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데에는 리처드 1세가 성지에서 원정을 벌이는 동안 프랑스 북부에 있는 잉글랜드 영토를 공격할 기회를 엿본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의 왕위 찬탈을 부추기는 한편, 노르망디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존과 필리프 2세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평화 조약을 맺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오스트리아 공국에서 레오폴트 5세 (오스트리아 공작) 공작에게 붙잡혔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신병을 확보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 (신성 로마 황제)에게 그의 석방을 늦춰달라고 요청하며 존의 왕위 찬탈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리처드 1세는 하인리히 6세에게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때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조심하라, 악마가 풀려났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석방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존을 굴복시킨 뒤, 자신이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내 영토(벡상 등)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왔다. 필리프 2세는 아키텐 공령의 제후들을 선동하여 리처드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저항했지만, 전쟁에 능한 리처드 1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점령했던 영토를 차례로 내주었다. 특히 1194년 7월 3일, 벙돔 지방 프레토발 전투에서는 금고와 공문서까지 버리고 도망쳐야 할 정도로 크게 패배했다. 1196년의 기종 조약에서는 지소르를 제외한 점령지 전부를 리처드 1세에게 반환해야 했다. 그러나 1199년, 리처드 1세는 아키텐 공령의 샬뤼 성 공성전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고, 그의 조카 아르튀르 1세 (브르타뉴 공작)와의 경쟁 속에서 존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2. 4. 리처드 1세와의 전쟁과 존 왕 즉위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 1세는 동생 존을 굴복시킨 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벡상 등)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필리프 2세는 아키텐의 제후들을 선동하여 리처드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맞섰으나, 전쟁의 달인인 리처드를 당해내지 못하고 점차 영토를 회복당했다.특히 1194년 7월 3일, 프레트발 전투에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크게 패배하여 금고와 중요 공문서까지 버리고 도주해야 했다. 이후 양측은 일시적인 휴전을 맺었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1196년의 기종 조약에서는 필리프 2세가 지소르를 제외한 점령지 전부를 리처드에게 반환해야 했다.
이후 3년간(1196-1198) 전쟁은 점차 필리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리처드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과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조카 오토 4세 등 강력한 동맹을 확보했고, 많은 노르망디 영주들이 리처드의 편으로 돌아섰다. 1198년 9월, 필리프는 지소르 근처에서 리처드의 군대에게 기습을 당했다. 필리프의 군대는 후퇴하던 중 엡트 강의 다리가 무너져 필리프 2세가 강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으나 구조되어 지소르 요새로 피신했다. 1198년 가을까지 리처드는 1193년 이후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양측의 전력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1199년 1월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센 강에서 만나 지소르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5년간의 장기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99년, 리처드 1세는 아키텐의 샬뤼 샤브롤 성 공성전 중 입은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리처드의 뒤를 이어 동생 존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으나, 조카 아르튀르 1세와의 계승 분쟁이 있었다. 이로써 필리프 2세는 강력한 숙적 리처드 1세가 사라진 유리한 상황에서 존 왕과의 항쟁을 이어가게 되었다.
2. 5. 존 왕과의 전쟁과 영토 확장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존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 플랜태저넷 왕가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할 결정적인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1200년, 존 왕은 이미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약혼한 상태였던 이자벨 오브 앙굴렘과 결혼했다. 이에 격분한 위그 10세는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에게 호소했다.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법정에 소환했으나, 존 왕은 이를 거부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존 왕의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존 왕의 조카이자 왕위 경쟁자였던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에게 노르망디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를 지원했다.
1203년, 존 왕이 아르튀르를 포로로 잡아 살해하자 프랑스 내 제후들은 존 왕에게 등을 돌렸다. 필리프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 행동에 나서, 브르타뉴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앙주, 메인, 투렌, 푸아투 등 존 왕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거의 저항 없이 점령했다. 1204년경에는 남부의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플랜태저넷 영지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로써 필리프 2세는 오랫동안 프랑스 왕권에 위협이 되었던 '앙주 제국'을 사실상 해체하고 프랑스 왕령을 크게 확장하는 숙원을 달성했다.
존 왕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번번이 필리프 2세에게 격퇴당했다. 결국 존 왕은 루아르 강 이북 영토에 대한 프랑스 왕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213년, 존 왕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당하자,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지지를 얻어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했다. 존 왕에게 불만을 품은 잉글랜드 제후들과 웨일스, 아일랜드의 호응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존 왕이 잉글랜드 왕국 자체를 교황에게 기증하며 봉신이 되는 외교적 승부수를 던지자, 교황은 잉글랜드 침공 지지를 철회했고 필리프 2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 침공에 협력하지 않았던 플랑드르 백작을 공격했으나,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플랑드르 군에게 격퇴당했다.

1214년, 존 왕은 실지 회복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조카인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 및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대규모 작전을 계획했다. 존 왕 자신이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는 동안, 오토 4세와 페랑의 독일-플랑드르 연합군이 북부 플랑드르 방면에서 프랑스로 침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왕태자 루이(훗날 루이 8세)에게 군대를 주어 남부의 존 왕을 막게 하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북부로 향하여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의 연합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필리프 2세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부빈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승리로 필리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했으며, 노르망디를 비롯한 플랜태저넷 가문의 옛 영토를 확고히 프랑스 왕령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강력한 제후였던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담마르탱을 포로로 잡아 프랑스 내 왕권을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215년, 존 왕의 폭정에 반발한 잉글랜드 제후들이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하도록 강요한 후, 일부 제후들은 필리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왕태자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제안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승인하여 루이는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한때 런던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216년 존 왕이 사망하고 잉글랜드 제후들이 존의 어린 아들 헨리 3세를 왕으로 옹립하며 루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루이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2. 6. 부빈 전투와 프랑스의 우위 확립
1208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될 유력한 후보였던 슈바벤의 필리프가 암살당하면서, 그의 경쟁자이자 존 왕의 조카인 오토 4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오토는 즉위 전에 존이 프랑스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212년까지 존과 오토는 모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존은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에 대한 교황의 지명을 거부했고, 오토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빼앗으려 했다. 필리프 2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심했고, 먼저 독일에서 젊은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독일 귀족의 반란을 지원했다. 존은 즉시 잉글랜드의 힘을 오토에게 쏟았고, 필리프는 이제 잉글랜드 침공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기회를 보았다.침공 계획에 모든 봉신들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리프는 존을 교회의 적으로 비난하여, 그의 공격이 종교적 양심에 의해서만 동기 부여된 것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수아송에서 프랑스 남작들의 회의를 소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유일한 예외는 플랑드르의 페르디난트 백작이었다. 그는 필리프의 아들 루이 8세가 점령한 리르와 생토메르 마을을 잃은 것에 분노하여 참여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옛 영토를 되찾을 때까지 어떤 작전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필리프는 로마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 예정된 침공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교황들이 추진해 온, 소원해진 아내 덴마크의 잉게보르와의 화해를 수아송에서 발표했다. 남작들은 그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했고, 모두 병력을 모아 필리프와 합류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필리프는 그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장려하고 있던 교황 사절 판돌프 베라치오와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베라치오는 또한 잉글랜드 왕 존과 비밀리에 논의를 진행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에게 그의 불안정한 상황을 조언하며, 존을 설득하여 서임권 분쟁에 대한 반대를 포기하고, 어떤 교회 분쟁에 대해서도 교황 사절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동의했다. 그 대가로 교황은 잉글랜드 왕국과 아일랜드 영지를 교황 봉토로 받아들였으며, 존은 교황의 봉신으로 이를 다스리고,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1213년 5월, 존과 교황 사이의 조약이 비준되자마자, 베라치오는 필리프에게 존에 대한 원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왜냐하면 성좌의 충실한 봉신을 공격하는 것은 대죄이기 때문이었다. 필리프는 자신의 계획이 로마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고, 그의 원정은 교황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대사를 얻는다는 조건하에 시작되었으며, 원정을 준비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고 헛되이 주장했다. 교황 사절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베라치오는 대안을 제안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존 왕이 여전히 파문된 상태에서 필리프가 잉글랜드에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부정했으며, 그의 불복종은 처벌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프는 기꺼이 이 조언을 받아들여, 즉시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 영토로 진격했다.

프랑스 함대는 먼저 그라블린으로 향한 다음 담므 항구로 향했다. 한편 육군은 카셀, 이프르, 브뤼헤를 거쳐 겐트를 포위했다.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필리프는 영국 함대가 담므에서 그의 배 여러 척을 나포했고, 나머지 배들은 항구에 너무 빽빽하게 봉쇄되어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함대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대의 파괴는 다시 한번 존의 희망을 높였고, 그는 프랑스 침공과 잃어버린 영토의 재정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처음에 이 원정에 열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출발이 지연되어 1214년 2월에야 그는 라 로셸에 상륙했다. 존은 루아르에서 진격할 예정이었고, 그의 동맹 오토 4세는 플랑드르 백작과 함께 플랑드르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세 군대는 효과적으로 협력하지 못했다. 존이 로슈오무안 전투에서 쫓겨나 수송선으로 후퇴한 후, 쉬운 승리에 대한 그의 희망이 실망스러워졌을 때 오토가 이끄는 황제군은 저지대 국가에 집결했다.

(''프랑스 대 연대기'', c. 1350–1375)
1214년 7월 27일, 대치 중인 군대는 갑자기 서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리스 강의 작은 지류, 부빈의 다리 근처에 있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필리프는 동맹군이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안식일에 싸우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필리프의 군대는 약 7,000명이었고, 동맹군은 약 9,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군대는 부빈 전투로 알려진 곳에서 충돌했다. 필리프는 격렬한 전투 중에 플랑드르 창병에게 말에서 떨어졌고, 만약 그의 갑옷이 없었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오토가 부상당하고 겁에 질린 말에 의해 전장에서 옮겨지고,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가 심하게 부상당해 포로로 잡히자, 플랑드르와 황제군은 전투가 패배했음을 알고 돌아서서 전장을 도망쳤다. 프랑스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필리프는 승리하여 파리로 돌아와, 포로들을 긴 행렬로 뒤에 세우고, 감사하는 백성들이 승리한 왕을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전투 후 오토는 하르츠부르크 성으로 후퇴했고, 곧 신성 로마 황제에서 축출되어 프리드리히 2세로 교체되었다. 페르디난트 백작은 패배 후 감옥에 갇혔고, 존 왕의 앙주 제국 재건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필리프의 결정적인 승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에서 서유럽 정치의 형성에 매우 중요했다. 잉글랜드에서 패배한 존은 너무 약해져서 곧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보통법의 기초를 세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해야 했다. 부빈 전투는 앙주 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우위를 확립하고 카페 왕조의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7.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 개입
1208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될 유력한 후보였던 슈바벤의 필리프가 암살당하면서 황제의 자리는 그의 경쟁자이자 존 왕의 조카인 오토 4세에게 돌아갔다. 오토 4세는 즉위 전에 존 왕이 프랑스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212년까지 존 왕과 오토 4세는 모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권력 투쟁을 벌였다. 존 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에 대한 교황의 지명을 거부했고, 오토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빼앗으려 했다. 필리프 2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심했고, 먼저 독일에서 젊은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독일 귀족의 반란을 지원했다. 존 왕이 즉시 잉글랜드의 힘을 오토 4세에게 쏟아붓자, 필리프 2세는 이제 잉글랜드 침공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기회를 보았다.침공 계획에 모든 봉신들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교회의 적으로 비난하여, 그의 공격이 종교적 양심에 의해서만 동기 부여된 것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수아송에서 프랑스 남작들의 회의를 소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유일한 예외는 플랑드르의 페르디난트 백작이었다. 그는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가 점령한 리르와 생토메르 마을을 잃은 것에 분노하여 참여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옛 영토를 되찾을 때까지 어떤 작전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필리프 2세는 로마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 예정된 침공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교황들이 추진해 온, 소원해진 아내 덴마크의 잉게보르와의 화해를 수아송에서 발표했다. 남작들은 그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했고, 모두 병력을 모아 필리프 2세와 합류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필리프 2세는 그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장려하고 있던 교황 사절 판돌프 베라치오와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베라치오는 또한 잉글랜드 왕 존과 비밀리에 논의를 진행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에게 그의 불안정한 상황을 조언하며, 존 왕을 설득하여 서임권 분쟁에 대한 반대를 포기하고, 어떤 교회 분쟁에 대해서도 교황 사절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동의했다. 그 대가로 교황은 잉글랜드 왕국과 아일랜드 영지를 교황 봉토로 받아들였으며, 존 왕은 교황의 봉신으로 이를 다스리고,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1213년 5월, 존 왕과 교황 사이의 조약이 비준되자마자, 베라치오는 필리프 2세에게 존 왕에 대한 원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왜냐하면 성좌의 충실한 봉신을 공격하는 것은 대죄이기 때문이었다. 필리프 2세는 자신의 계획이 로마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고, 그의 원정은 교황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대사를 얻는다는 조건하에 시작되었으며, 원정을 준비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고 헛되이 주장했다. 교황 사절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베라치오는 대안을 제안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존 왕이 여전히 파문된 상태에서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에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부정했으며, 그의 불복종은 처벌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프 2세는 기꺼이 이 조언을 받아들여, 즉시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 영토로 진격했다.
2. 8. 혼인 관계와 교황과의 갈등
1190년 첫 번째 부인 이자벨 드 에노가 출산 중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재혼을 결심했다. 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인 잉게보르를 선택했고, 지참금으로 은 10,000 마르크를 받았다.[2] 1193년 8월 14일 아미앵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식 직후 필리프 2세는 잉게보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2] 그녀를 생모르데포세 수도원으로 보내고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혼인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결혼 무효를 청원했다. 그러나 잉게보르 본인은 혼인이 성사되었으며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비라고 주장했고, 덴마크 측 성직자들도 그녀를 지지했다.필리프 2세는 새로운 신부를 찾아 제네바 백작의 딸 마가렛과 혼담이 오갔으나, 토마스 1세가 그녀를 납치하여 결혼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1196년 6월, 메라니아 공작 베르톨트 4세의 딸 아녜스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3] 아녜스와의 사이에서 마리와 필리프 두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잉게보르와의 혼인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결혼을 중혼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하고 필리프 2세에게 아녜스와 헤어질 것을 명령했다. 필리프 2세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1198년 그를 파문하고 1199년부터 1200년 9월까지 프랑스 전역에 성무정지 명령을 내렸다.[4] 이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는 미사, 세례, 결혼, 장례 등 모든 성사가 중단되는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위생 문제와 전염병 확산까지 초래했다.
교황의 압력과 존 왕과의 분쟁에서 교황의 지지가 필요해진 정치적 상황, 그리고 1201년 아녜스가 병으로 사망하자[3] 필리프 2세는 결국 교황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녜스의 죽음을 잉게보르 탓으로 돌리며 그녀를 에탕프 성에 유폐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잉게보르를 멀리했으나, 1213년 플랑드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덴마크의 지원이 필요해지자, 잉게보르의 오빠인 발데마르 2세와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침내 잉게보르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필리프 2세는 직접 에탕프 성을 찾아가 잉게보르에게 오랜 학대를 사과하고 그녀를 해방시켰다. 그럼에도 필리프 2세는 교회의 간섭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으며, "(자신이) 이슬람교도였다면 좋았을 텐데. 교황이 없는 살라딘이 부럽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생드니 연대기에 남아있다.
2. 9. 내정과 종교 정책
필리프 2세는 프랑스 건축과 교육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 파리의 주요 간선 도로를 포장하고[5], 중앙 시장인 레알을 건설했으며[5], 1163년부터 시작된 노트르담 대성당 건설을 꾸준히 지원했다. 또한 요새로서 루브르 궁전의 초기 형태를 건설했으며, 1200년에는 파리 대학교에 헌장을 수여하여[5] 파리가 중세 유럽의 중요한 학문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에는 파리 주변에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 성벽을 건설하기도 했다.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왕령 내에 바이이(국왕 대관) 제도를 확립하여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사법 제도 개혁을 통해 왕실 법정에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사법 체계에서의 왕의 영향력을 높였다.[5] 또한, 도시(코뮌)를 보호하고 육성하며 상업을 진흥시켜 왕국의 재정 기반을 튼튼히 했다. 코뮌을 '집합 영주'라는 특수한 가신으로 취급하여 시민들의 프랑스 왕국에 대한 귀속 의식을 높이는 효과도 거두었다.[5][6] 이렇게 증대된 수입은 프랑스 해군 건설에도 투자되어, 필리프 2세는 카페 왕조 최초로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왕이 되었다. 1215년까지 그의 함대는 총 7,000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었고, 2년 내 대형 선박 10척과 다수의 소형 선박을 보유하게 되었다.

종교 정책 면에서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루이 7세의 관용적인 유대인 정책과는 달리, 1180년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 유대인들에게 귀중품을 빼앗고 몸값을 요구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추가 과세를 부과하겠다고 명령했다. 1182년 4월, 부분적으로 왕실 재정을 늘리기 위해 그는 모든 유대인을 왕령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7월에는 파리의 유대인 가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레알 시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조치로 왕실은 단기적으로 몸값만으로 15,000 마르크를 벌어들였으나, 이는 유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브리콩트 로베르에서는 99명의 유대인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1198년에는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하며 정책을 변경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1208년 랑그도크의 카타르파(알비파)에 대한 알비 십자군을 소집했을 때, 필리프 2세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귀족들의 참여를 막지도 않았다. 초기에는 잉글랜드 왕 존과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의 위협을 이유로 교황의 참여 요청을 거절하고 시몽 드 몽포르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214년 부빈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남프랑스 제후들의 반격으로 십자군이 어려움을 겪자 1216년부터는 왕태자 루이(루이 8세)를 파견하여 개입하기 시작했다. 비록 알비 십자군의 최종적인 결실인 프랑스 남부 복속은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 이루어졌지만, 필리프 2세의 개입은 남프랑스에 대한 왕권 확장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필리프 2세는 1216년부터 1222년까지 샹파뉴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여 전쟁 종식에 기여했으며, 1224년에는 시인 앙리 당들리가 그의 의뢰로 와인 시음 대회인 와인 전투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2. 10. 말년과 사망

필리프 2세는 1222년 9월 병에 걸려 유언장을 작성했지만, 이후 회복하여 여행을 계속했다. 다음 해 여름, 더운 날씨 속에서 여행하다가 열병에 걸렸다. 국왕은 다시 회복되었고, 왕국 순회를 재개할 만큼 건강이 좋아졌다. 부분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1223년 7월 13일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에게 무리가 되었고, 결국 다음 날인 7월 14일 이블린주 망트라졸리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상여에 실려 파리로 옮겨졌으며,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루이 8세, 사생아 아들인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 그리고 예루살렘 왕 브리엔의 요한이 참석한 가운데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유산과 평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비견되어 존엄왕(Auguste프랑스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8]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 왕권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필리프 2세는 플랜태저넷 왕가가 프랑스 내에 보유하고 있던 광대한 영토, 특히 노르망디, 앙주 등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잉글랜드 왕가의 프랑스 내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북부 프랑스의 강력한 제후 세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하여 중앙 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1214년 부빈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는 그의 치세 중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으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 플랑드르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확립하고, 잉글랜드에서는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하게 되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알비 십자군을 이용하여 남부 프랑스(랑그도크)와 부르고뉴 지역에까지 왕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7]
내정 면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여러 도시의 성장을 지원하고 수도 파리를 대대적으로 정비했으며, 파리 대학교의 설립을 지원하는 등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프랑스인으로서의 통일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 약 1세기 동안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잘생기고 건장하며, 쾌활하고 혈색 좋은 얼굴을 가졌고, 좋은 음식과 술, 여자를 즐기는 기질"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또한 "친구에게는 관대했지만 그를 거스르는 자에게는 인색했으며, 책략에 능하고 신중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판단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운이 따랐지만 자신의 안전을 중시했다. 쉽게 흥분하면서도 쉽게 진정되었고, 강력한 반대자들에게는 가혹했지만 불화를 조장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적을 감옥에서 죽게 하지는 않았으며, 겸손한 인재를 등용하고 오만한 자들을 억누르며 교회를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의 정책에는 비판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아버지 루이 7세의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과는 달리, 1182년에는 프랑스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강경책을 시행했다. 이는 왕실 재정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이후 1198년에는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하기도 했다.
3. 1. 후대에 미친 영향
(1332-1350년경, ''프랑스 대 연대기'')]]필리프 2세가 즉위하기 전, 프랑스 왕가인 카페 왕조의 왕권은 매우 미약했다. 본래 파리 백작이었던 카페 왕조는 10세기 카롤링거 왕조 단절 후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지배 영역은 본령인 일 드 프랑스와 일부 왕령에 국한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이나 플랑드르 백작 같은 강력한 제후들과 비슷한 수준의 실권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역대 왕들은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특히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왕위를 겸하게 되면서(노르만 정복)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자 어려움을 겪었다. 필리프 2세의 아버지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 다키텐과의 결혼으로 한때 아키텐 공작령을 확보하며 왕권 강화의 기회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무정부 시대라는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엘레오노르와 이혼했고, 그녀가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오히려 잉글랜드부터 남프랑스에 이르는 광대한 앙주 제국의 탄생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국은 플랜태저넷 왕조에 의해 흡수될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태어난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왕권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선대 왕들과 달리 왕령 확장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1185년 아미앵 백국 획득을 시작으로, 1218년에는 클레르몽 앙 보베지 백국을 매입했으며, 1219년 알랑송 백작 로베르 1세 사망 후에는 알랑송 시와 알랑송 백국을 왕령에 편입시켰다. 또한 그의 장남 루이 8세는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1190년 아르투아 백국을 상속받았다.
필리프 2세의 이러한 적극적인 영토 확장은 이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후대 프랑스 왕들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업적은 프랑스 왕국의 영토적 기틀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4. 가족 관계
필리프 2세는 1165년 8월 21일 고네스에서 아버지 루이 7세와 어머니 샹파뉴의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1180년 4월 28일, 필리프 2세는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 백작 부인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1세의 딸인 에노의 이자벨과 결혼했다. 이자벨은 지참금으로 아르투아 백작령을 가져왔다.
이후 덴마크의 잉게보르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메라니아 공작 베르톨트 4세의 딸 메라니아의 아녜스와 결혼하였다. 또한 아라스 출신의 신원 미상의 여성과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두었다.
필리프 2세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부인/애인 | 자녀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에노의 이자벨 | 루이 8세 | 1187년 9월 5일 – 1226년 11월 8일 | 프랑스 국왕 (1223–1226),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결혼하여 자녀를 둠. |
로베르 (쌍둥이) | 1190년 3월 14일 출생 및 사망 | ||
필리프 (쌍둥이) | 1190년 3월 14일 – 1190년 3월 17일 | ||
메라니아의 아녜스 | 마리 | 1198년 – 1238년 8월 15일 | 첫 번째로 나뮈르의 필리프 1세와 결혼, 두 번째로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둠. |
필리프 위르펠 | 1200년 7월 – 1234년 1월 14/18일 | 결혼으로 불로뉴 백작, 불로뉴 백작 부인 마틸다 2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둠. | |
아라스 출신 여성 (이름 미상) | 피에르 샤를로 | ? – 1249년 | 누아용 주교. |
참조
[1]
서적
ロバーツ(2003)p.220-222
[2]
문서
一説では初夜にインゲボルグの口から酷い口臭がしていたことが原因とされる。
[3]
문서
当初、[[ジュネーヴ]]伯ギヨーム1世の娘[[マルグリット・ド・ジュネーヴ]]との再婚が決まっていたが、マルグリットが結婚式のためにパリに向かう道中、待ち伏せていた[[サヴォイア伯国|サヴォイア伯]][[トンマーゾ1世・ディ・サヴォイア|トンマーゾ1世]]によって彼女は連れ去られ、そのまま2人は結婚してしまった。そのため再度王妃を選抜し、アニェス・ド・メラニーと結婚した。
[4]
서적
ロバーツ(2003)p.152
[5]
서적
佐藤&池上(1997)pp.325-326
[6]
서적
中世ヨーロッパの王の義務には、外敵に対する防衛、王国内の教会の保護、裁判義務があった。佐藤&池上(1997)p.325
[7]
서적
中世フランスの名君としては、他に[[ルイ9世 (フランス王)|ルイ9世]]、[[フィリップ4世 (フランス王)|フィリップ4世]]の名がしばしば挙げられる。鶴岡(2012)p.38
[8]
서적
フランスでは、せいなる「聖油入れ」「ユリの花」「王旗」がドイツの神聖ローマ皇帝に対する対抗の象徴であり、フィリップ2世はじめルイ9世、フィリップ4世はいずれも、一貫して「いとも敬虔なる王」たることを主張して、自己の王権を権威づけた。佐藤&池上(1997)pp.32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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